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스토 뤼티 (문단 편집) === 희생양 === 7월 중순 전선이 교착되면서 뤼티는 건강을 비롯해 여러 이유를 내세워 사임했다. 핀란드 의회는 만네르헤임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는 특별법을 제정해 만네르헤임이 차기 대통령이 되었다. 핀란드는 계속전쟁 때 확보한 영토를 모두 포기하는 대가로 소련과 단독 강화했다. 독일군은 [[노르웨이]] 방면으로 후퇴하면서 핀란드군과 교전을 벌이고 민간인을 살상했다([[라플란드 전쟁]]). 대통령직을 사임한 뤼티는 국립은행 총재직으로 돌아갔다. 1945년 봄, 소련은 핀란드에 [[핀란드 전쟁책임 재판|전범재판]]을 요구했다.[* [[계속전쟁]]을 [[독소전쟁]]과 마찬가지 수준의 침략전쟁으로 규정한 것이다.] 피고는 뤼티, 탄네르, 링코미에스 등 사실상 --미꾸라지-- 만네르헤임을 제외한 전시 지도부 전부였다. 핀란드인들은 이 전쟁이 [[겨울전쟁|소련의 선제공격]]으로 일어난 것이라 생각했기에 이것을 승자의 정의로 여기고 매우 못마땅해했다. 자연히 희생양으로 지목된 뤼티의 평판은 더욱 높아졌다. 핀란드 헌법은 소급입법을 금지하고 있으나, 소련의 압력으로 수정헌법을 통과시키면서 억지로 규정을 만들어 전범재판이 진행되었다. 그나마 국내법으로 재판을 받은 것이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뤼티는 형기가 가장 긴 징역 10년을 선고받았고, 옥중에서 위암에 걸렸다. 1949년 핀란드 "전범"들은 모두 가석방되었다. 뤼티는 석방되자마자 병원으로 실려갔다. 새 대통령 [[유호 쿠스티 파시키비]]는 뤼티 등을 모두 사면했다. 사면된 뤼티는 공직에 복귀하지 않았고 1956년 사망했다. 향년 67세.[* 마찬가지로 전시대통령이었던 칼리오도 67세로 죽었다. 그들보다 나이가 많던 [[카를로 유호 스톨베리|스톨베리]], [[페르 에빈드 스빈후부드|스빈후부드]], [[유호 쿠스티 파시키비|파시키비]]는 모두 80세 넘게 살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